Erase
"일루전의 붉은 세상을 없애줘."
크러쉬 답게 그는 조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긴장한 채로 또박또박 그에게 말했다.
"그 대신 내가 카르마에 가겠어.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해.
넌 모든 코마들을 카르마에 가두는 게 목적이잖아?"
"대단한 조건을 내거는 걸."
금기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루전, 그 녀석에게 그 정도로 정을 주는 코마가 나올 줄은 몰랐어."
"일루전도 너잖아? 왜 계속 괴롭히는 거야?"
"그래, 다들 착각하지.
나쁜 금기가 착한 일루전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이야."
금기는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단조롭게 말했다.
"내가 하는 짓은 별 거 아니야. 그 녀석이 하고 있는 짓에 비하면.
코마, 너처럼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 녀석이라고."
금기는 그것이 굉장히 나쁜 일이라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 이곳에서 나는 걸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계기를 그가 만들었다고 해서 미워할 일도 없었다.
"난 이 세계가 좋아.
그러니까 네 말이 사실이더라도 별로 상관없어."
"그렇기 때문에 너는 더더욱 카르마로는 갈 수 없지.
제안은 고맙지만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카르마는 너 같은 사람을 환영하지 않거든.
카르마는 게으른 자들의 낙원이야.
목적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지."
"그럼 어째서 여기까지 나를 들여보내 준 거야?
내가 이 말을 하러 왔다는 걸 알잖아?"
"그래, 그렇지. 그럼 뭐가 좋을까?"
금기는 빙긋빙긋 웃으며 양 옆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뭐가 말이야?"
"네 별명 말이야."
금기는 매우 즐거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캐셔가 말했다. 금기를 만났다간 당장에라도 별명이 붙어버릴 거라고.
"그래!"
그 때, 금기가 박수를 짝 치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Eraser. 이레이저가 좋겠어!"
"이레이저?"
"너는 처음부터 지우고 싶은 게 많았지.
그런 너에게 정말 어울리는 별명이야.
어때? 이 세상에 남아 이레이저가 된다면
네가 직접 이 세상에서 붉은 세상을 지워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싶었지만 금기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