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테라스로 나가자 마자 보인 것은 예전에 보았던 캐셔의 집이었다.
캐셔는 집 마당에 있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나를 알아차리고는 토끼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나온 테라스의 문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라?"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문이 사라진 것을 재차 확인하는 나에게 캐셔가 말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 모양이네. 혹은 아직 어딘가로 가는 중이거나."
나는 캐셔를 바라보았다. 캐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코마와 크러쉬가 되었구나."
크러쉬.
잠깐 전에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나와 똑같은 얼굴로 나를 죽이려던 사람.
피이드가 말했었다.
크러쉬는 나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내 뒤를 쫓는다고.
죽고 싶지 않으면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크러쉬는 날 왜 죽이려는 거야?"
"또 다른 자신이니까. 죽기가 싫어?"
"물론이야."
"그렇다면 기억을 찾아."
기억을 찾으라고?
'나'는 항상 기억을 잃고 싶어했다. '기억'은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잃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을 기억했던 '나'의 목적지는 항상 '망각'과 '죽음'이었다.
"크러쉬는 현실로 나가고 싶어하지. 너는 아니고."
맞는 말이다. 나는 이 곳에 계속 있고 싶었다.
기억을 되찾고 싶지도 않았고, 현실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꿈을 상징하는 네가 현실을 택한다면 크러쉬는 널 죽일 이유가 없어."
현실을 택하라는 말. 문을 열고 '현실'로 나가라는 말.
그 말은 피이드에게 수도 없이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그 말대로 됐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목적지는 항상 '망각'과 '죽음'이었다.
나는 잊고 싶었고 죽고 싶었다.
다시 그런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나는 다시 똑같은 목적지를 헤매게 되는 게 아닐까?
망각을 떠안고 죽음 사이를 유랑하면서.
"현실로 나가지 않으면 나는 계속 쫓기게 되는 거야?"
"싫다면 크러쉬와 싸워서 이기는 것도 방법이야.
하지만 크러쉬는 또 다른 너야. 원래는 너와 하나였던 존재.
그런 존재를 죽일 자신은 있어?"
그런 게 있을리 만무했다.